한국인 민족성에 대한 비판[편집]
그는 '한국인들이 아는 척, 잘난 척 하기를 좋아한다'고 비꼬았다.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6]'라는 것이다. 이어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6]'라고 지적하였다. 이어 박중양은 '조선인들은 애국심만 있다면 범죄행위를 해도 허용되거나 묵인하는 습성이 있다'고 질타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인의 악벽'이라 하여 조선인들에게 존재하는 악질적인 버릇을 지목했다. 그는 한국인들의 악질적인 버릇으로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152]'를 들었다. 이러한 악질적인 습관을 가진 덕에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며, 일본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 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신뢰를 가볍기 여기고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악습을 갖고 있다고도 지적하였다.
박중양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할 자신도 없으면서 누군가 나서서 악습을 타파하고 개신하려 들면 방해하고 험담하여 좌절, 무산시킨다'고 비판했다. 하등 자신감도 능력도 없으면서, 하려는 사람들을 (뒤에서) 비판, 악평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6]라며, 이것이 조선인 최대의 결점이라 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강도부터 독립 이후의 반탁 테러꾼들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많다며 그들은 부끄러움과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일갈하였다.
박중양은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놈 치고 사기꾼, 협잡배가 아닌 놈 없으며, 정의로운 척 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숨기지 않는 놈이 없다'며 말보다 그 사람의 행동을 먼저 살펴볼 것을 주문하였다. 또한 '타인의 말을 듣기 보다 그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고 판단할 것이며, 타인의 말은 참고사항 정도로만 여기면 된다'하였다.
그는 '편협성, 배타성, 폐쇄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가 조선인들의 악벽이다. 형제숙질에게[152] 의존하는 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들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기생하여 사는 것)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인 속담도 있다.[153]'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가족끼리 서로 봐 줄 수 있다고 보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인간으로 몰리게 됐다. 1945년 독립 직후에는 조선인의 근성에 대한 성토와 규탄을 하였지만 결국 그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괴짜, 정신질환자로 몰려 무시당하기에 이르렀다.
개화파 애국자론[편집]
그는 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고종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며 195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일각에서는 역적 취급을 받던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도 매국노가 아니라 선각자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역적이라 조선 상하가 흉언하였지만 이조 말년의 선각자이고 애국지사다[4]'라는 것이다.
'(그들은) 국정유신을 약모(계획)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당시 뜻대로 성사하였으면 분명 우리가 일본과 비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김옥균 등 개신파가 실패하고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박영효 일인이 귀국하고 대개는 객사하였다. 그들의 유가족을 생각하면 동정하는 눈물이 없을 수 없다.[6]'고 하였다. 이어 그는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 김옥균의 최후를 두고도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6]'라며 분개하였다.
이어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6]'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좌우합작을 반대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던 제1공화국의 관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는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김옥균, 서재필 등이 역적이 아니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안경수, 윤치호, 권영진, 조의형, 장박, 유길준 등이 국사를 범한 죄인들이 아니다. 이완용 등이 매국노가 아니다.[6]'라며 항변했다. 그는 '애국자를 박해하다 못해 처참하게 죽이는 그런 국가, 그런 정부에는 애국을 할 필요가 없다'며 역설하였다.
이어 그는 조선이 최초로 독립한 것을 日·淸전쟁 이후 때로 보기도 했다. 그는 단군 조선 이후 기자 조선. 신라, 고려,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고, 중국에 사대를 하였으며, 조선왕조에 와서는 중국의 속국 노릇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며, '선인들의 애국심이 금일에 기고만장 떠들고 있는 사람들만 못한 것이 아니고 충의가 금일의 큰 소리를 장담하는 자들만 못한 것도 아니다. 불가항력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소이다. 조선이 청국의 예속을 면하고 독립하는 것이 조선인의 실력이 아니고 日·淸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결과 일본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6]'란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구느냐'며 항변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는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에 공녀와 인삼, 금은 등의 조공을 바친 것은 왜 아무도 비판하지 않느냐'며 계속 되물었다.
국가와 국민관[편집]
그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신의 일기나 독립 후에 쓴 술회, 반민특위 공판장에서 그는 한결같이 '국가는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민을 배려하지 않는 국가, 정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인민을 살피지 않는 국가와 정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하였다. 방청석에서 반발이 나오자 그는 '조선 조정이 백성들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냐'고 항변하였다.
그는 재판 중 반성하지 않는 것[10]으로도 회자화되었다. 그가 공판을 받는 동안 방청석과 재판장 내·외부에서는 반역자, 매국노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되풀이하였다.
그는 재판 중 반성하지 않는 것[10]으로도 회자화되었다. 그가 공판을 받는 동안 방청석과 재판장 내·외부에서는 반역자, 매국노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되풀이하였다.
원인은??
경제적 관점으로 봤을때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조세 시스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민본주의와 성리학적 청백리관이 더해진 구도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 걷고, 관료는 적은 녹봉으로 만족하고, 지방 병영은 그 나름의 수세제도를 갖추는 등, 중앙집권화 국가로서는 비현실적으로 중앙정부에 세금이 모이지 않는 중,근세 역사상 가장 작고 가난한 정부조직을 가진 나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과 그를 이어 받은 대한제국은 극히 일부 시기를 제외하면 무슨 일만 있으면 재정부족, 재정부족, 재정부족의 돌림노래를 부르고, 관료들은 생계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적은 녹봉을 받고, 아전들도 공식적인 급여가 없었다.[6] 즉, 이건 절대로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겉으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한들, 전술한대로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기에 조선의 왕실과 중앙정부가 이런 적은 재정으로 유지하는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이 때문에 실제 조선의 재정시스템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관례화 된 부정부패로 유지된다. 왕실은 내장원이라는 별도의 주머니를 만들었고, 중앙 관료는 지방관들에게 반공식적인 뇌물 수증을 받았고[7], 지방관은 하다못해 수증을 내기 위해서라도 지방민들을 수탈해야 했고, 군대는 군대대로 수익원이 없어서 농사를 짓거나 후대에는 상업 활동을 했고[8], 공식적인 급여가 적었던 향리들도 그냥 알아서 백성들을 수탈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고도 중앙정부에는 여윳돈이 없기 때문에 전쟁을 치르건, 성을 쌓거나 궁전을 짓건, 길을 닦고 광산을 개발하고 기술을 개발하건 그걸 할 수 있는 수익원부터 당장 찾거나 혹은 강제로 동원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9]. 조선시대의 정책이 모두 땜질처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조세시스템에 기반한 부족한 재원탓이었다. 더 문제는 이 조세시스템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명분상으로는 아주 훌륭했으며, 무엇보다도 왕권을 줄이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중앙관료, 지방관, 아전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권한 이상으로 수탈 할 수 있는 구도였기 때문에, 이 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저 구도하에서는 민란이 발생해도 백성들의 불만이 중앙 정부가 아니라 지방관, 더 극심하게는 아전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10]에 아전들이 우리도 녹봉을 받고 수탈 안하고 싶다고[11] 싶다고 청원을 한 적이 있으나, 단칼에 거절 당했다. 결국 이 문제는 심지어 대한제국 시기까지 해결이 안 되어서, 조선은 가난한 나라라는 인식의 배경이 되게 된다.
사상적으로 봤을때...
중국의 속국이라는 관념을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 이 시기 조선이라는 정체의 업이긴 하다. 스스로가 사대를 정치적으로 너무 많이 이용해 먹어 자승자박을 해버린 게 문제. 특히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전쟁공 신들의 역할을 깎아내리고자 명나라 군대의 전공을 드높이고 자국 군대의 공적을 깎아내린 선조의 실책이 크다. 이후 재조지은면서 명나라의 크고 아름다운 은혜가 없었으면 우리는 망했을거야라는 생각이 뿌리내려버렸고 기존의 실리적인 사대 대신 맹목적인 사대가 나타났다. 광해군때는 신하들이 중국 핑계를 대며 왕의 명에 항거하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개화기에는 이양선이 교역을 요구할 때마다 교역을 거부하면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멋대로 너희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라고 했으니 사실상 스스로 만천하에 자신들의 사대주의를 홍보한 셈. 오히려 청나라에서 조선이 외교와 국방에선 자주권을 누려왔다고 해명했다. 사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서양의 개항 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다. 더불어서 "우리를 건들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걸?"하는 나름대로의 경고(?)를 겸해서. 그러나 서양 사람들 관점에선 거의 자기들이 아는 '식민지' 비슷한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거문도 사건.
그러나 개화기의 지식인들도 비슷한 '사대'를 강하게 비판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갑신정변에서도 제일 먼저 청나라와의 예속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했고, 독립협회에서도 영은문을 박살내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사대'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개화기에는 이양선이 교역을 요구할 때마다 교역을 거부하면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멋대로 너희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라고 했으니 사실상 스스로 만천하에 자신들의 사대주의를 홍보한 셈. 오히려 청나라에서 조선이 외교와 국방에선 자주권을 누려왔다고 해명했다. 사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서양의 개항 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다. 더불어서 "우리를 건들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걸?"하는 나름대로의 경고(?)를 겸해서. 그러나 서양 사람들 관점에선 거의 자기들이 아는 '식민지' 비슷한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거문도 사건.
그러나 개화기의 지식인들도 비슷한 '사대'를 강하게 비판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갑신정변에서도 제일 먼저 청나라와의 예속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했고, 독립협회에서도 영은문을 박살내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사대'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가 아닌 "어떻게 조선은 500년이나 버티어 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도 있다. 실제로 500년도 못가서 망한 나라들도 꽤 많다.